엄마가 죽고 난 후 일용직 노동자- 소위 말하는 노가다꾼인 아빠는
8살배기, 5살배기 딸 둘을 혼자 키웠다.
우리를 없게 키우지 않기 위해 아빠는 피눈물을 흘렀지만, 애석하게도 아빠의
피눈물의 대가는 크지 않았다. 그냥 나와 내 언니와 아빠, 세 식구가 죽지않고 살 정도였다
중학교 시절을 ‘공부 잘 하는 아이’로 보낸 나는 지역에서
공부 잘 하기로 소문난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.
고등학교에 갔더니 성적이 팔 떨어졌다, 이런 진부한 클리셰가 아니었다
첫 고등학교 시험에서 전교 2등을 했다. 자부심이 컸다.
학원 하나 안 다니고,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문제집 야금야금 사서 전교 2등을 했다는 게
힘들어하고 슬퍼할 겨를이 없는 고3을 보냈다.
나에겐 두 번의 기회는 절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, 죽어라 공부만 했다.
그리고 아빠가 싸준 기름범벅 김치볶음밥을 싸들고 수능장으로 향했다.
수능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 채점을 할 때 까지 계속 다리를 떨었다.
언니랑 아빠가 나를 위해 희생해준 것이 아무 소용 없어질까봐.
그리고 오늘, 아빠가 아웃백을 사 줬다. 그것도 4인 랍스터 세트로.
언니와 내가 스파게티와 스테이크와 랍스터까지 먹는 모습을 본 아빠는 또 울었다.
아빠가 울어서 나랑 언니도 또 울었다. 울면서 4인 세트의 모든 음식을 다 먹었다.
배가 찢어지게 부를 때까지 음식을 먹어 본 것은 처음이다. 그리고 배가 찢어질 때까지
음식을 먹어본 아빠와 언니의 모습도 처음이다. 정말 좋아보였다.
인생의 한 줄기 빛이 열린 우리 모두의 모습이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.